저는 거의 7년 전부터 저만의 굿즈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어 다양한 시도를 해왔어요.
타이포그래피 연작은 물론 캐릭터를 만들어 인스타툰을 연재하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승인되어 판매도 이루어졌으며, 굿즈를 제작해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참가를 준비하기도 했어요. (코로나로 페어가 취소되어 재고만 남았지만)
하지만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죠.
3번의 미승인, 5개월의 제작 기간을 거쳐 힘겹게 출시한 이모티콘의 실제 월 매출액
특히 카카오 이모티콘에 많이 도전했어요.
카카오 이모티콘 제안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승인이 많이 발생해요. 여러 차례의 미승인 끝에 마침내 승인이 되어 5개월 만에 겨우 출시했지만, 첫 달 매출은 30만 원. 이후 매출은 쭉쭉 떨어졌으며 현재는 한 달에 13,000원 정도의 매출을 기록했어요.
미승인 과정까지 거의 일 년을 매달려서 만든 이모티콘의 정산 금액을 보면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어요.
미디어에는 이모티콘을 출시하기만 하면 집을 사거나 억대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듯한 자극적인 글들이 많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한 달에 수백 개의 이모티콘이 출시되지만, 그 중 극히 일부만 성공해요.
안팔리는 이모티콘 : 우울한 양대리와 백수 친구 펭사장
많은 실패를 겪은 후에도 다시 저만의 굿즈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디자이너 월급으로는 먹고살기 쉽지 않기도 하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실패하고 싶지 않았고, 이전의 실패 요인에 대해 고민해보았어요.
실패한 이유 고민하기
SNS 계정(@yangjin.c)에 남아있는 이런저런 시도의 흔적들
제 작업들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귀엽거나 트렌디하지 않다’,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죠.
뼈아픈 말이지만 모두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이것을 구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애매하게 귀엽고, 애매하게 트렌디하며, 애매하게 공감되고, 결국 애매하게 팔렸어요.
이번에는 이전처럼 실패하고 싶지 않았어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정말 사람들이 구매할 만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고민 끝에 결론은 "브랜딩을 해야 한다"였어요. 브랜딩이 바로 브랜드와 제품의 기준과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활동이기 때문이에요.
브랜딩 시작하기
브랜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인터넷과 책을 찾아보며 브랜딩에 대해서 알아봤고, 브랜드 프레임워크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어요.
*프레임워크 :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을 위한 틀
브랜딩 프레임워크는 브랜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틀이에요. 여러 항목을 순서대로 채우고, 시각 요소들을 만들기만 해도 브랜딩을 할 수 있어요.
인터넷에 수많은 브랜드 프레임워크가 올라와 있기 때문에, 제가 만들 굿즈 브랜드에 어울리는 걸 찾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 브랜드 프레임워크 예시 : Standard Brand Framework - Mary Jane Braide
나에게 맞는 방식 만들어보기
하지만 딱 '이거다' 싶은 프레임워크를 찾지 못했어요.
대부분의 프레임워크는 기업이나 스타트업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작은 굿즈 브랜드’에 적합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항목도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브랜딩 초보자인 저에게 Vision, Mission, Values, Personality와 같은 브랜딩 용어들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없으면 만들어보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항목도 많이 넣을 필요 없이, 딱 필요한 것으로 두세 가지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SSENCE
브랜드의 본질을 정의하는 부분입니다. 무엇을 하는 브랜드인지 명확하게 작성해 주세요.
우선, 브랜드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만들 브랜드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이루려는지 명확히 해야 해요. 그래야 뭔가를 만들거나 결정할 때 명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첫 번째 항목은 ‘ESSENCE’로 정했어요.
'목적'과 '수단' 중 하나만 있는 경우,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
목적만 있는 경우: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거야" → 어떻게 할지 모름
•
수단만 있는 경우: "귀여운 것들을 만들 거야" →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 모름
•
둘 다 있는 경우: "나는 귀여운 것을 만들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거야" → 명확함
VALUES
제품으로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정의하는 부분입니다. 고객에게 정말로 필요한 가치인지 고민하고 작성해 주세요.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굿즈나 이모티콘을 시작하는 많은 분이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지, 고객이 그 제품을 왜 돈을 주고 사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그렇게 시도했다가 많은 실패를 겪었어요. 따라서 두 번째 항목은 'VALUES'로 정했어요.
프레임워크 작성하기
완성한 프레임워크를 채우기 전, 내가 어떤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지 먼저 고민해 봤어요. 어떤 작업을 할 때 내가 즐겁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는지 되짚어 봤어요.
오래전부터 틈틈히 진행한 한글 타이포그래피 아트워크, 이 작업들을 기반으로 브랜딩을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글 굿즈'를 중심으로 하는 브랜드를 만들자는 결정을 내렸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업이고,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가장 좋았으며, 시장에 나와 있는 한글 굿즈 브랜드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창성도 있을 것 같았어요.
결정 후, 한글 굿즈 브랜드를 제대로 만들려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어요.
ESSENCE
이 문장이 제가 해온 ‘타이포그래피’ 작업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사람들이 왜 좋아했는지 생각해 봤어요. 저는 주로 직장인으로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문구로 사용했는데요. 저와 비슷한 연차와 상황에 있는 직장인분들이 어쩌면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많이 공감하고 즐거워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늘 제 이야기를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분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타이포그래피'로 대신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게 제 작업의 본질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타이포그래피로 대신합니다.’ 라는 문장을 브랜드 에센스로 정했어요. 브랜드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수단은 타이포그래피에요.
VALUES
한글이 들어간 굿즈를 구매하는 고객들은 어떤 걸 기대할까요? 아마도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기대하기보단 독특한 디자인이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분들이 구매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따라서 두 가지의 가치를 정하게 되었어요. 첫 번째는 자기표현이고 두 번째는 B급 감성이에요.
자기표현 - 고객은 제품을 이용해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을 특별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제품을 구매할 고객들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말들을 특별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B급 감성 - 단순한 한글 제품이 아닌 B급 감성의 독특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으로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완성도 높은 타이포그래피 아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프레임워크 완료하기
작성이 완료된 프레임워크에요. 굿즈 브랜드는 고객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Channel’이란 항목을 추가했고, 고객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지도 작성했어요. 그리고 채널에서 사용할 로고와 배너도 제작했어요.
“개성 넘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로 사람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만듭니다.”
작성한 프레임워크를 보고 있으니 이런 문장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이 문장처럼 고객이 브랜드에서 개성과 유쾌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임워크를 토대로 아트워크를 제작하여 SNS 채널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고 오라운드를 통해 굿즈도 하나씩 출시했어요.
브랜드 프레임워크라는 기준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아트워크와 굿즈에 일관성이 생겼고, 정말로 하나의 ‘브랜드’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아트워크와 굿즈의 반응도 예상보다 좋아서 실제로 판매도 꽤 이루어지고 있어요. 지금은 브랜드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천천히 고민하는 중이에요.
한글 타이포그래피 아트워크
‘자기표현 + B급 감성’이 담겨있는 굿즈들
인스타그램으로 진행 중인 이벤트
결론
사실 브랜딩을 한다고 굿즈가 무조건 잘 팔리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굿즈로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그건 브랜딩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서 생긴 결과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데도 물구하고 굿즈를 만들 때 꼭 브랜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랜드의 정체성과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할지 고민하고 제품을 만들어가면서 많이 공부하고 성장했어요. 7년간 '그냥' 시도하며 실패했을 때보다 훨씬 많이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보고 계실 여러분들은 그냥 시작하기보다 꼭 브랜딩을 통해 꼭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크리에이터 양진
웹디자인, 일러스트, 타이포그래피, 폰트, 이모티콘, NFT까지 다채롭게 선보이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작가입니다.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있다면 오라운드에서 양진 작가의 작품을 한 번은 만났을 거예요. 직장인의 애환 속에 담은 위트 한 스푼! 양진 작가의 작품은 고된 일상을 웃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양진 작가의 아트워크가 궁금하다면 지금 그라운드로 바로 가기!